새벽 산책 허밍

2024.11.06




남희 님께 연락받은 건 한 달 전, 미경 님을 통해서다.

에무 시네마’에서 11월 3일에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함께 진행해 보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남희 님이 ‘일인용( )’을 운영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앰비언트 음악으로 디제잉을 하시는 줄은 몰랐다.

메일에는 ‘일인용’과 진행하고 계시는 ‘오디오 극장’과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열리는 ‘격조콘’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

사실 메일을 읽고 공연을 이해하진 못했다.

내게는 앰비언트와 디제잉이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성격이었고, 디제잉에 관한 경험 또한 없다 보니 상상도 어려웠다.

전화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되기 시작했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 설렜다.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으므로 다른 일정보다 공연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시놉시스는 내가 써보기로 했고, 다음날 공유했다.

남희 님은 다른 시놉시스를 써서 두 인물이 우연히 만나는 옴니버스 영화를 제안했다.

두 사람이 고르는 음악이 각각의 캐릭터라고 생각하니 좋았다.

음악을 골랐다.

음반으로 디제잉을 하신다고 하여 시놉시스에 맞는 CD와 LP를 고르고 그 안에서 수록곡을 골랐다.

18개의 앨범과 곡을 공유했다.


일주일 뒤에 첫 미팅을 했다.

보통은 뵙고 난 후에 일을 진행해서 이 상황이 약간 멋쩍었다.

남희 님이 쓰신 시놉시스를 읽었다.

책에서 영감을 받는 편이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남희 님이 발췌하신 책 내용과 공연 방향이 잘 들어맞았다.

책은 황수영 작가님의 <새벽 산책 허밍>.

일인용에 오신 손님들이 읽는 모습을 여러 번 보고, 구매했다고 하셨다.

두 시놉시스를 모두 쓰기에는 서로의 문체가 달라서 어느 한쪽은 수정해야 했다.

내가 쓴 시놉시스는 정해진 이야기고, 남희 님의 시놉시스는 상상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남희 님의 시놉시스만 사용하기로 했다.

공연 제목도 책 제목과 같게 하고 싶어서 작가님께 메일로 허락을 구했다.

즐거이 허락해 주셔서 기뻤다.


남희 님이 과거에 만든 믹스셋을 들었다.

음악을 듣고 나니 지난주에 고른 곡과 거리가 느껴졌다.

현실과 동떨어진 산책 같다는 표현이 맞았다.
너무 짧은 곡은 디제잉이 어렵다는 것도, CD 다음 순서에는 LP가 나와야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앨범과 곡을 다시 골라서 공유해 드렸다.

환상을 덜어내고, 명암이 있는 음악들로.

그렇게 총 31개의 앨범과 곡을 드렸다.


공연 게시물 이미지는 내가 고르고, 디자인은 남희 님이 맡아주셨다.

‘고향에 내려와 있다’는 점과 ‘이제 이곳에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바로 시골집이 떠올랐다.
그 사진은 벽제에서 돌아온 직후에 찍은 사진이었다.

더 이상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시골집.

근처에 예쁜 산책로는 없지만, 그곳에서 시작하는 산책이 숲으로 이어졌으면 해서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촬영한 풍경을 이어 붙였다.

추가로 고른 앨범도 전해드리고, 공연이 진행되는 오후 2시의 현장을 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두 번째 미팅은 에무 시네마에서 했다.

룰루랄라 님이 알려주신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다.

도시에서 자연으로 연결되는 길에 감탄했다.

사진을 찍고 올리기로 했다.


모든 일이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 비중이 거의 없어서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른다.

플레이 순서를 정하고, 디제잉을 하는 중요한 일은 남희 님이 맡았기 때문이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해서 남희 님이 정말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날까지 고민을 거듭하며 리스트를 짜고 계실 모습이 그려졌다.

마침, 플레이 리스트를 공유 받은 시점이 공연 당일 새벽이라 더더욱.


서로의 음반 12개씩, 총 24곡이 담긴 플레이 리스트다.

내가 먼저 곡을 고를 수 있게 해주셨고, 남희 님은 그에 맞춰서 선곡하셨다.

곡 대신 전체 앨범을 드린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직접 앨범을 들어보시곤 곡을 고르셨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음반이 골고루 들어가게끔 신경 쓰면서 플레이 순서를 정하셨다.

여러 번 배려 받았다.


‘오디오 극장’은 화면 없이 듣는 영화고, 오늘은 ‘격조콘’의 포맷 덕분에 공연 중에 자유롭게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 있다.

실내에서는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을 것 같아서, 날씨가 좋기를 바랐다.

다행히 추워지기 전 맑고 포근한 가을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잎이 떨어지고, 새 우는 소리가 꾸준히 들렸다.

무대 뒤의 나무들 사이로 해가 반짝였다.

의도된 것과 우연한 것이 만나 인터렉티브한 공연이 만들어졌다.

남희 님이 이곳에서 공연하고 싶어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희 님과 함께 오신 소영님, 그리고 룰루랄라 님과 공연 시작 전, 테라스에서 김밥을 나눠 먹었다.

소풍 온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즐거웠다.

관객분들이 입장하고 시작 전 인사와 소개를 했는데,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늘 어렵고 어색해서 빼먹은 내용이 많다.

앞으로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어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곡이 넘어가고, 낙엽이 흩날리고, 새 소리가 음원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수진 님의 곡이 재생될 때는, 관객분들 모르게 와계신 수진 님과 우리만 아는 비밀이 생긴 것 같았고, 장필순의 음악은 알고 계신 분이 많아서 반갑게 들을 수 있기도 하고, 어느 영화에서 나올 법한 느낌이라 남희 님의 선곡 센스가 돋보였다.

가을에 밖에서 들으니 그 목소리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조미료 같은 곡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실내 공연을 해서 촬영을 편하게 하기 어려운데, 야외 공연이고 소리도 꽤 커서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공연은 남희 님이 하시니 열심히 기록을 남겨서 드리고 싶었다.

30분 정도 남았을 때는 지수와 산책도 했다.

사전답사 왔을 때보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날씨와 계절, 풍경 모두 최고여서 좋은 기분이 배가 되었다.

마지막 곡이 나올 때는 영상을 끊지 않고 촬영했다.

곡도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 같아서 자막만 넣어도 근사할 것 같았다.


영상도 시나리오도 없는 영화가 끝나고, 뒷정리하는 사이에 관객분들은 모두 퇴장했다.

덩그러니 남은 의자들을 봤다.

공연은 실제로 열리지 않았고, 우리들의 상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산책의 여운이 남아있다.

오래도록 추억할 만한 영화를 들려주신 남희 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이날의 장르는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사진 : @zisu_oo








Setlist


  1. Maru - 여름의 피아노
  2. 경진 - Komorebi
  3. Annea Lockwood - For Ruth
  4. Sarah Hopkins - Kindred Spirits
  5. 수진 - A Morning Walk
  6. Inoyama Land - A Egypto
  7. Ben Vida With Yarn/Wire And Nina Dante - Still Point
  8. Haruka Nakamura - Cadenza
  9. 장필순 -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piano ver.)
  10. Theodore Cale Schafer - Crowd
  11. Kenji Kihara - Scene
  12. Kenji Kihara - Morning to
  13. Hirofumi Nakamura - Midori
  14. 전호권 - 숨
  15. Moshimoss - Chasing Butterflies
  16. 박지하 - Nightfall Dancer
  17. Rip Hayman - Seascapes
  18. Stephan Mathieu, Ekkehard Ehlers -New Years Eve
  19. 모임 별 - 2
  20. Blgtz - → (305 demo)
  21. Gia Margaret - Ash
  22. Visible Cloaks, Yoshio Ojima & Satsuki Shibano - Stratum
  23. Evan Parker - 8.29
  24. Virginia Astley - A Summer Long Since Passed


밑줄 : 공유드린 음반 중에서 남희 님이 고른 음악

나머지 : 남희 님의 음반에서 남희 님이 고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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