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30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레코드페어에 참가했다.
부스 참가 이력이 있으면 자동으로 신청서를 보내주는 것 같다.
작년보다 두 달 당겨졌고, 장소도 코엑스에서 문화비축기지로 바뀌었다.
코엑스는 주차가 어렵고 하역장이 혼잡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문화비축기지는 야외이면서 판매 구역도 분산되어 차량 이동이 수월해 보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판매자 입장이고, 구매자 입장에서는 실내 대기가 가능한 코엑스가 더 좋을 것 같다.
문화비축기지는 날씨가 안 좋으면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판매 구역은 T1에 에어컨이 없다고 해서 T2를 선택했지만, 신기하게도 페어 당일 갑자기 가을 날씨가 되어서 쾌적했다.
작년에 만든 9페이지짜리 판매 리스트를 수정했다.
추후 온라인 판매를 할지 말지 불확실한 앨범까지 더해서 총 다섯 페이지가 늘었다.
판매 가격을 알 수 없어서 불편했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가격도 표시했다.
CD 플레이어도 새 모델이 추가되었고, 처음으로 카세트테이프와 카세트 플레이어도 선보일 준비를 했다.
카세트 플레이어는 CD플레이어에 마음을 뺏겼던 것처럼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취급하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더 마이너한 방향으로 간다.
올해도 소일의 현진 님과 함께했다.
전보다 길게, 3일 내내 도움을 받았다.
현진 님은 소일과 별개로 1년 전부터 공예를 기조로 소품과 가구를 만드는 “도구점 은파”를 작가님과 하고 있는데, 수관기피에서 판매중인 CD 플레이어 거치대가 바로 은파에서 맞춤 제작한 것이다.
디자인도, 원하는 방향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제조사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거치대를 만들어 주셨다.
바쁜 시기에 본업을 미뤄둔 채 레코드페어를 위해 울산에서 와주셔서 감사함과 죄송함이 동시에 일었다.
품앗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내가 늘 신세 지는 쪽이다.
수관기피의 시작부터 거의 매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이 동기화되어서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혼자 하는 일은 외롭고 금방 지치기 마련인데, 현진 님이 계셔서 잘 버티는 중이다.
마음이 든든하다.
전날 챙겨둔 짐을 차에 싣고 문화비축기지로 향했다.
굵은 비가 쏟아졌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했다.
서울에 오래 살았지만, 잘 돌아다니지 않아서 문화비축기지도 처음 가봤다.
레코드페어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장소다.
소풍 장소로 제격이다.
이번에는 앨범 종류가 늘어난 만큼, 샘플 앨범을 박스에 분류해 두기로 했다.
택배 보낼 때 사용하는 박스가 안성맞춤이라 다행이었다.
문제는 배정된 부스 안쪽이 협소해서 의자를 두기도 어려웠고, 재고 놓을 자리도 부족했다.
금방 적응되었지만,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이다.
다음 회에는 개선되면 좋겠다.
우려했던 습도는 다음 날 비가 그치면서 해결되었다.
오프라인 행사를 할 때면, 나는 모르지만 나를 아는 분들을 만난다.
수관기피 사이트를 둘러본 적 있거나, 음반을 주문한 적 있는 분이라면 나의 이름, 사진, 글 중에 하나쯤은 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시는 분들을 맞이하다 보니 고마운 분도 못 알아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답답했다.
간혹 본인 소개를 하는 분이 계실 때면 참 감사했다.
일요일에는 토요일만큼 사람이 붐비지 않기도 했고 지수가 합류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다른 부스도 구경하고, 메리고사운드, 동양화성, 6v6 레코딩스에 인사드리러 갈 수 있었다.
이번 페어에서 가장 사고 싶었던 앨범은 오미일곱 님의 퇴색의 흔적(a trail of fading)이다.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처럼 나른하고, 몽환적인 느낌이 가득한 앨범이다.
토요일에 방문해 주신 덕분에 바로 구매하고 사인까지 받을 수 있었다. 다음 날 6v6에 갔을 때는 안 계셔서 토요일에 함께 오셨던 분과 왑띠 님과 인사 나눴다.
작년보다 많은 분들이 방문해 주셨다.
권월 님, 코듀로이 님, hemming 님, 전 직장 동료, 작년에 오신 분, 다른 팝업에 오셨던 분, 수관기피를 하면서 알게 된 분, 오래전부터 지켜봤다는 분, 조용히 다녀가시는 분, 여러 앨범을 들어보시는 분, 음악 하시는 분, 그림 그리시는 분, 구매를 망설이는 분, 사진을 찍는 분, 다른 부스 참가자님, 페어 관계자님, 그리고 우리 가족.
많은 사람들이 취향에 공감해 주거나, 하는 일에 응원을 보내주는 것 같았다.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철수할 때는 현진 님의 기지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빠져나왔다.
코엑스에서 애먹은 기억 때문에 걱정이 컸는데, 다행이다.
차를 가지러 가는 길에 아버지가 벤치에 앉아 계신 걸 봤다.
전날 동생과 함께 다녀가시기도 했고, 아무런 말씀 없이 오셔서 모를 뻔했다.
그냥 오신 거라고 했다.
가기 전에 주차장에서 보자고 하셨다.
짐을 싣고 나가는 길, 창문을 내리자, 저녁 공기가 기분 좋게 시원했다.
나가는 순서를 기다리는 줄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축하한다며, 난과 함께 고구마, 땅콩, 가지를 주시고는, 복잡하니 어서 가라고 하셨다.
수관기피를 시작하고 첫 월급을 받은 느낌이다.
지금 하는 일을 떳떳하게, 직업이라고 소개하기 어려웠는데, 앞으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게 인정받은 느낌이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바른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멋지게 보답하고 싶다.
사진 : @zisu_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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