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틀런과 미녀는 괴로워

2022.11.23




첫 글을 어떤 주제로 시작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셔틀런과 미녀는 괴로워로 정했다.


셔틀런

영화를 떠올리면 대표곡 Maria의 멜로디가 들린다.

나는 영화보다 음악을 먼저 알았다. 그렇다고 일찍 안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에 뒤처진 편이라 중학교 테니스장이라는 개연성 없는 장소에서 Maria를 들었다.

지금도 아이돌, 드라마, 유행 같은 것들을 못 따라간다.


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났다면 학교 체육시간에 키와 몸무게를 재고, 앉아서 무릎을 펴고 팔을 뻗는 유연성 검사, 50m 달리기, 멀리뛰기 등을 몰아서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중엔 셔틀런도 있다.

(20m 거리의 두 선 사이를 다음 신호음이 울리기 전에 왕복하여 달리는 심폐지구력 측정 프로그램)


기억 속 그날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테니스장에 라인을 그리고, 일렬로 서서 오디오에서 나오는 음악과 안내 음성에 맞춰 달리기 시작했다.

이때 함께 나온 음악이 Maria다.

처음엔 걸어도 충분한데, 신호음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면 나중에 온 힘을 다해 달려야 반대편 선을 넘을 수 있다.

일찍 포기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스스로 근력은 부족해도 지구력은 좋다고 생각해서 종목 통틀어 가장 열심히 했다.

승부욕도 있었다.

보통 60-70번대까지 가면 3명 정도 남는다.

신호가 울리면 반사적으로 반대편으로 달리게 된다.

폐가 점점 아파오고 일정 수준을 넘으면 머리가 비워지고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먼저 끝난 친구들은 라인 밖에서 응원을 한다.

응원은 힘이 되어 조금 더 달릴 수 있게 만든다.


셔틀런은 스스로 끝을 정하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멈출 것인지 뒤돌아 반대편으로 달릴 것인지 짧은 시간에 결정해야 한다.

한 번 더 갈 수 있지 않나? 이것밖에 안되는 건가? 같은 많은 생각을 하기엔 짧다.


멈춘 후에는 심박수와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휴식을 가져야 한다.

다시 달리기 위해선 잘 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시엔 몰랐는데 셔틀런은 학교 밖에서도 계속된다.


나는 셔틀런이 단순히 심폐지구력만 측정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인내와 끈기를 길러주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멈추는 법과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멈추는 것도 한계를 아는 것도 달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지금도 Maria를 들을 때면 도입부 기타 리프부터 심장이 뛴다.

화창한 날씨에 달리기 하나에만 집중해서 한계까지 갔던, 10분도 채 안되는 숨찬 기억이 이렇게 오래간다.


오늘도 누군가는 달리기를 한다. 그게 20번대든 70번대든 내가 참여자라면 함께 달리고, 아니라면 라인 밖에서 진심을 담아 응원할 것이다.

더 달릴 수 있게, 혹은 잘 멈출 수 있게.




미녀는 괴로워

2006년 연말을 장식했던 미녀는 괴로워는 흥행에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만화가 원작이지만, 성형을 통해 주인공이 새 삶을 얻는다는 소재만 같고 전체 스토리가 다르기 때문에 별개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는 2000년대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요즘 나오는 영화를 15년 뒤에 봐도 같은 느낌이 들까.

영화에 기록된 현재는 미래에 흥미로운 과거가 된다.


뛰어난 가창 실력과 목소리를 가졌지만, 외모 때문에 가수가 되지 못하고 다른 가수에게 목소리를 빌려주면서 얼굴 없는 가수로 사는 주인공이 있다.

그녀는 자기의 노래를 인정해주는 PD를 좋아한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된 그의 말에 큰 상처를 입고 실의에 빠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다가 전신 성형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본래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눈빛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PD 역시 그녀를 좋아하는듯했다.

PD의 도움으로 꿈꾸던 가수가 되었지만, 친구와 가족까지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다시금 자신을 지운다.

하지만 그녀를 수상히 여긴 립싱크 가수에 의해 정체를 들키고 PD도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다.

결국 그녀는 모두가 보는 무대에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고 모두에게 이해를 받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2000년대에 나온 한국 영화 중에 좋은 영화가 많다.

당시에만 말할 수 있고 담을 수 있었던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는 외모지상주의다.

만들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점점 나를 잃어가는 슬픔이 영화의 웃음 뒤에 숨겨져 있다.

이 점이 관객의 공감을 사지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문제를 돌파하는 주인공에게 위안을 얻는다.


도망치는 것이 아닌, 찾아가는 과정이다.
영화 속 한나처럼.




Maria의 원곡 Blondie –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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